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수·순천 10.19 사건 (문단 편집) === 지리산 유격대 === 48년 11월 중순 지창수가 이백여명의 잔여 병력을 이끌고 백운산으로 들어오면서 총 6백명의 병력이 집결하였다. 조계산 방면에도 2백 명이 가 있기는 했지만, 최초 14연대 반란군과 4연대 일부 병력, 이에 동조하는 좌파세력까지 합쳐 4천명에 달하는 수의 병력이 작살나, 열흘 남짓만에 겨우 1/5 밖에 남지 않았다. 나머지 병력 중 4백명은 진압군과 싸우다 죽고, 2천8백명은 생포되어 재판에 넘겨져 있었다. 49년 1월 10일까지 진행된 군사재판에서 410명에게 사형이 선고된 뒤 바로 집행되었으며, 568명은 종신형으로 대전교도소 등지에 분산 수감된다. 기타 병사들은 10년 이상 중형을 받고 수감되다가 6.25가 터지면서 전부 총살당한다. 지리산 입산 이후 반란군은 빨치산화하였다. 기존의 14연대 반란군 출신들만이 아니라 남로당 중앙에서 보낸 이현상이 사령관이었으며, 구례군당(위원장 최규복)등 지방 좌파 세력이 대거 합류했기 때문이다. 또한 최규복과 박종하가 지리산에서 14연대 반란군에게 사상 교육을 하기도 하는 등, 당이 군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였다. 2년 후의 일이지만 이현상이 이들 부대를 [[남부군]]이라는 이름으로 이끌고 남하할 때 편제를 보면, 사령관 이현상, 총참모장 박종하(전 구례군당 유격대장), 정치위원 여운철(전 충남도당 위원장) 승리사단장 이진범(14연대 하사관 출신)으로 구성된다. 즉 반란군 14연대 색깔이 많이 약해진다. 소설 <남부군>의 저자 이태가 전북도당에서 전속된 부대가 승리사단 서울부대(부대장 14연대 사병 출신 김금일)였는데 다른 빨치산 부대와 달리 승리사단은 ~~일본군한테서 배운~~ 국군 특유의 악습이 남아 있어 구타와 폭행이 잦았다고 한다. 용어도 빨치산식 어투가 아닌 국군식 용어를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이태의 회고에 따르면 이현상이 포위되었을 때, 노획한 국군 무전기를 통해 국군식 무전법으로 국군 부대간 교란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지방 유격대와 달리 여성이 적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정지아의 소설 <빨치산의 딸>에 의하면, 정지아의 부친이자 주인공인 유혁운(본명 정운창)은 곡성군당 소속이며 여순사건시 14연대 반란군이 인민군이 곧 내려와서 해방시켜 준다는 말을 믿고 기뻐한다. 그러나 며칠만에 14연대가 지리산으로 도망가자, 조직이 전부 노출된 상태라 할수 없이 대거 입산하여 도당, 군당, 면당 별로 빨치산화하여 투쟁한다. 당시 지방 조직원들이 어떻게 빨치산이 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주의 할 것은 이들이 전부 14연대에 합류해서 남부군이 된 것이 아니라, 여수-순천지역에 있다가 14연대를 따라가거나 지리산이 있는 구례군당 정도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군당/면당원들은 해당 군/면 지역 안에서만 활동하는 빨치산이 되었다. 명령 계통도 전남도당의 지휘를 받았을 뿐, 이현상 부대와는 별개였다. 그러나 상호 협조 관계가 되어 구례군당 유격대장 ~~지리산 호랑이~~ 박종하, 또는 <빨치산의 딸>의 저자 정지아의 엄마이자 구례군당 소속 이옥자(본명 이옥남)처럼 소환 형식으로 이현상 부대로 넘어가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